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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 시리즈는 한동안 챙겨보다가 어느 순간 시시하게 느껴져 끊었다. 문득 8이라는 숫자와 낯익은 이름들을 보니 알록달록한 잔잔함이 그리워 읽게 되었다. 강윤정의 글을 읽으며 만약 그녀가 레비의 무덤을 그날 봤더라면 아마 기차를 놓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과 노을이 저자를 붙잡아 시간의 소용돌이 속으로 집어삼켰을 테니 말이다. 오은 시인이 사십대인 줄 알았는데 한참 젊다. 계산해보니 회고한 여행은 이십대 중반 즈음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잊고 있던 몇 번의 즉흥여행과 사람들이 생각났다. 한 무리의 여대생들의 수다를 엿들었던 기억이 난다. 식성이 까다롭지 않은 여행 파트너가 최고라고. 주책없이 끼어든다. ‘얘들아, 입맛도 바뀐단다.’ 여행을 다녀온 뒤 관계가 소원해졌다할지라도 함께 한 추억이 남는다는 점에서 특별해진다. 파트너가 좋다면 어디든 못 가랴. 날이 좀 궂으면 또 어떤가. 누구랑 함께 하느냐가 여행의 강권이다. 위서현의 글은 커피 잔이 비워지는 느낌이다. 쓸쓸하고 공허해지지만 그것 또한 살아있는 동안 번번이 마주해야 할 빈 잔임을 안다. 누군가가 머물다 사라진 자리에, 희미한 바람이 일어 잠시 현기증이 났다. 이대로 존속하기 위해 기댈 환상이나 의존 대상이 있다면 기꺼이 잡을 터이다. 아무리 삶이 <맥베스>의 5막 5장과 <템페스트>의 프로스페로의 마지막 대사 같다고 해도. “긴 여행 끝에,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 그것만이 남는 거죠(59).”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보라 했던가. 이현호의 싸움닭 기질과 미성숙한 주장에 <어떤 날> 시리즈에 실린 이우성이 떠올랐다. 사실 여행지에서 비올 확률은 50%고, 음식이 맛없을 확률도 50%, 여행 파트너와 트러블이 생길 확률도 50%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는 이유가 다들 있다.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얻고자 하는 그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그때는 여행에 흡수되어 즐길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고, 지금은 유일무이한 여행지에서의 시간을 얼싸안는다. 극적 변화이자 엔딩이다. 여행이 권태와 무심함으로 인해 죽어가는 일상을 되살리려는 심폐소생술이라면, 저 ‘느끼는 존재의 여행’은 일상을 여행으로 탈바꿈하는 환골탈태다. (페소아 재인용 93) 장연정의 글을 읽다보니 옴마야, 나는 연즉 싱가폴도 안 가봤다. 쇼핑과 밤 문화의 도시는 나랑 잘 안 맞을 듯하다. 걷기도 전에 지치는 갑갑한 곳은 싫다. 일단 여행지에서는 하염없이 걷고 싶기 때문이다. 모든 여행이 늘 좋을 수만은 없다. 케미가 맞는 여행지가 따로 있기 마련이다. 여기 실린 여행담 중에서 정성일의 글이 가장 재미났다. 기대 잔뜩 하고 찾았을 두 번째 여행지는 제대로 망친 여행이었다. 캐리어는 늦게 도착하고 50매 원고지를 팩스로 지구 반대편으로 전송하고, 난방이 안 되는 곳에서 장염까지 앓고 겨우 먹는 게 켄터키 치킨과 커피라니. 추위와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데도 왠지 웃기다. 치킨과 커피가 천상의 맛이었을 것 같다. 츠릅. 그의 두 번째 낭트행은 본국으로 돌아가고픈 “율리시스의 여행”에 딱들어 맞는다. 살다보면 이런 웃픈 에피소드를 간직한 사람이 으뜸 승자다. 정세랑은 하와이의 여러 문물을 소개하며 뜻하지 않게 홀로 남겨졌지만 충분히 매료되었던 시공간에 대해 고백한다. 저자처럼 각자의 전공이 몸에 남아 어느 순간 문을 열어 빛을발하면 좋겠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을 망쳐버리고 싶다.
여행을 망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을 망치려면 일단 여행을 떠나야 한다.
그때는 늦지 않게 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여행의 시대다. 모두가 여행을 좋아한다고, 떠나겠다고, 떠나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한다. SNS로 여행을 ‘생중계’하는 시대에 여행은 우리 시대의 스토리텔링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여행이 우리를 흡족케 하는 것은 아니다. 여행을 준비할 때, 출발 직전에, 여행 도중에 여행은 종종 우리를 배신한다. 여행 정보가 넘쳐나서, 일정이 완벽해서 ‘망가질’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믿었던 여행 동반자가 여행을 ‘망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이도 있다. 여기저기 넘쳐나는 여행의 판타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도 적지 않다. 시인, 소설가, 작사가, 영화감독 등 유난히 섬세한 이들의 여행을 담는 여행 무크지 어떤 날 8호는 기억에 담고 싶지 않은, 그래서 오히려 기억에 남는 ‘망가진 여행’을 담았다. 그 망가진 여행을 회복하기 위해 그들은, 그럼에도, 다시 여행을 떠나겠다고 말한다. 그 어떤 모습이든, 일단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실패하여 지속될 수 있는 마음 / 강윤정
여행을 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 / 오은
그토록 사소한 기적을 바랐던 어느 여행가의 죽음 / 위서현
어떤 싸움의 기록 / 이현호
Last Summer / 장연정
11월의 어느 겨울에 낭트영화제를 가는 것에 대하여 / 정성일
파라다이스에 혼자 남겨지면 / 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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